2009년 6월 23일 화요일

영호남 지역갈등의 원천 ‘훈요십조’


영호남 지역갈등의 원천 ‘훈요십조’

 

왕건이 지목한 ‘背逆의 땅’ 호남 아니었다

 

고려의 창업주 왕건이 남긴 「훈요십조」 중 제8조는 지금까지 호남 차별 논리로 이용돼왔다. 그러나 왕건은 호남이 아닌 다른 지역을 「배역의 땅」으로 꼽았고, 후세 사람들이 이를 조작한 것이다.

 

설성경 연세대 문과대 교수·국문학


드러내놓고 말은 못하지만 영호남 지역갈등 문제는 21세기를 눈앞에 둔 우리에게 놓인 긴요한 과제 중의 하나다. 선거 때마다 고개를 내미는 지역갈등의 질퍽한 늪에서 우리는 늘 허탈감과 좌절감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앙금은 사회 곳곳에서 부작용을 일으키며 우리 사회 발전에 큰 장애가 돼왔다.

 

최근까지 지역갈등 해소를 위한 다양한 견해들이 제기됐지만 속시원한 해법이기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오해를 야기하며 「뜨거운 감자」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단을 넘어 통일 조국을 지향하는 현시점에서 이 문제를 그저 방치할 수도 없다는 것이 오늘의 절박한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 조건 속에서 필자는 학문적 시각에서 이 문제를 풀어보고자 한다. 사람들은 지역갈등의 원천적인 근거로 고려의 창업주 왕건이 남긴 「훈요십조(訓要十條)」를 거론하곤 한다. 훈요십조 중에 『차현(차령산맥) 이남은 산형과 지세가 모두 배역하였으니 인심도 그러하다』는 내용은 지역적 갈등과 편견에 깊은 영향을 미쳐 오늘까지도 문제로 지목되고 있다. 즉 이 내용은 영호남 지역갈등 조장의 원조격으로 특히 배역(背逆)으로 「찍힌」 지역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는 깊은 마음의 상처를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훈요십조란 과연 무엇인가. 고려 태조 26년(943) 4월, 왕건은 신임하던 신하 박술희(朴述熙)를 내전으로 불러들여 훈요십조를 주면서 후왕들에게 전하여 귀감으로 삼도록 하였다. 그 전문이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실려 전하고 있는데, 내용은 불교·풍수지리·토속신앙·유교·정치문제·대외관계를 다룬 것이다.

 

후에 훈요십조는 태조 왕건의 정치사상임과 동시에 고려의 정치이념으로 받아들여졌다. 그가 남긴 10가지 조항에서 가장 문제가 된 조항이 바로 영호남 갈등의 근거로 작용하는 제8조이다. 그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차현이남(車峴以南)과 공주강외(公州江外)는 산형과 지세가 모두 배역하였으니 인심도 역시 그러하다. 그 아래에 있는 주나 군의 사람이 조정에 참여하고 왕후·국척과 혼인하여 권력에 결탁하게 되면 국가에 변란을 초래하거나 통합당한 원망을 품고 임금이 거동하는 길을 범하여 난을 일으킬 것이며 (중략) 비록 선량한 백성일지라도 마땅히 벼슬자리에 두어 권력의 길에 들지 말게 하라』

 

「차현 이남 공주강 외」 논란

 

그런데 여기서 「차현(차령산맥) 이남 공주강(금강) 외」의 사람을 관직에 등용하지 말도록 하는 내용은 태조 왕건이 전하고자 한 본래의 뜻과는 달리 왜곡돼 버렸다는 게 필자의 해석이다.

 

이 조항은 역사적으로 일제강압기에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 편수관 이마니시(今西龍)에 의해 그 해석이 근본적으로 잘못되기 시작하면서 훈요십조 위작설의 단서로, 혹은 지역갈등 조장의 수단으로 악용돼 왔다. 말하자면 오늘날 지역갈등

문제의 원천은 일제 식민학자들의 잘못된 역사해석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태조의 풍수도참적 사고 관념에 기초하여 배역의 땅으로 지목되고 있는 「차현이남 공주강외」 지역에 대하여 그 범위를 좁히려는 해석이 최근 나오기 시작했지만, 지금까지는 차령과 금강을 북쪽 경계선으로 해서 그 아래의 남쪽 전지역을 포괄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통설로 굳어져 있었다.

 

이런 통설을 따르면 부여·공주·대전·논산·금산·옥천 등 금강 남쪽에 있는 충청 일부 지역과 전라남북도 전역, 곧 과거 후백제의 영역이 배역의 땅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왜 태조 왕건은 이 지역을 배역의 땅으로 지목하면서 그곳 사람이 비록 선량한 백성이라고 하더라도 관직에 임용하지 말 것을 유훈으로 남긴 것인가.

 

이 조항에 대해 가장 먼저 의문을 제기한 이는 이마니시 박사였다. 그는 훈요십조가 후대에 위작되었다는 증거로 제8조에 대한 의문을 들었다. 그는 태조의 중신 중에서 영암인 최지몽, 승주인 박영규, 나주인 장화왕후 오씨와 같은 이들이 모두 차현 이남 공주강 바깥 지역 사람이라는 점을 들어, 훈요십조는 태조가 제정한 것이 아니라 후대 후백제 지역 출신들에게 반감을 품은 친신라 세력인 경주인 최항이나 최제안이 조작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결론을 내렸다. 결국 이마니시는 「훈요십조 위작설」을 강변하면서 동시에 영호남 지역갈등까지 교묘하게 부추기는 해석을 내렸다.

 

이마니시 박사의 제8조 해석을 비판하면서 훈요십조의 위작설을 제일 먼저 부정하고 나선 사람은 이병도 박사였다. 이박사는 공주강 밖, 즉 후백제 지방의 산천이 모두 배역하여 사람들의 성품 역시 그 영향으로 배역성을 띠고 있다는 것은 이전부터 전하는 인습적 지리설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리고 태조가 영암인 최지몽, 승주인 박영규와 같은 후백제 지역의 사람들을 중신으로 기용한 것은 태조 당대의 특별한 사정에 의한 예외적인 일이라고 했다. 곧 새로 귀부(歸附)한 후백제인에 대한 위무책으로 취해졌다는 것이다. 태조 자신이 가장 걱정했던 바는 장래에 후백제 지방 백성들이 발호하여 국가를 어지럽히는 일이었고, 이를 후사에 주의시킨 유훈이므로 제8조 역시 후대의 위작으로 볼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결론적으로 두 사람의 논쟁을 검토해 보면 차현이남 공주강외를 후백제 지역으로 보는 견해는 일단 일치하고 있다. 다만 태조의 후백제인 중용 사실을 놓고 이마니시 박사는 훈요십조 위작설의 근거로 삼았고, 이병도 박사는 태조 당대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 훈요십조 제8조는 위작일 수 없으며 태조가 후왕들에게 전한 분명한 유훈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 결과 지금까지 사학계는 이병도 박사의 설에 의거해 이마니시 박사의 위작설을 부정하면서 차현이남 공주강외의 지역을 충청 일부와 호남지역이라는 설정을 별비판 없이 받아들였다. 여기서 필자는 훈요십조의 위작설을 부정하는 견해에는 동의하지만, 「차현이남 공주강외」를 오늘의 차령과 금강 이남 전역으로 설정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고 본다.

 

왕건에 반란한 지역들

 

「차현이남(以南) 공주강외(外)」의 글귀를 다시 한 번 살펴보자. 지금까지의 해석대로 차령과 금강을 북쪽 경계로 그 아래 남쪽 전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의심이 들기에 충분한 표현이다. 글자 그대로 「차현 이남」은 북쪽 경계선을 차령산맥으로 하고 「공주강 외」는 그 남쪽 경계선을 금강으로 설정한 지리적 표현이다.

 

더욱 결정적인 것은 「외(外)」는 『한화사전(漢和辭典)』 등에서 「바깥」이라는 의미와 「위(上)」라는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공주강 외」는 「공주강 위」라는 뜻이며, 지리적으로 공주강 북쪽을 가리킨다.

 

이렇게 되면 차령 이남과 금강 북쪽에 해당되는 지역은 지금의 홍성·보령·부여·공주·연기·청주 일대로 제한된다. 그러므로 태조 왕건이 제8조에서 지적한 배역의 땅은 호남 지역과는 무관하고, 차령과 금강 사이에 있는 충청권 일부의 극히 소규모 지역으로 좁혀진다.

 

물론 이러한 지역 설정이 단순히 「이남」이나 「외」 같은 몇몇 문구의 새로운 해석으로는 완결될 수 없다. 왕건이 이 지역을 지목한 역사적 배경 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차령 이남과 금강 이북 지역이 왜 태조 왕건으로부터 배역의 땅으로 지목되었고, 그 지역 백성들은 과연 어떤 차별대우를 받았을까?

 

첫째, 환선길·이흔암의 모반사건과 청주지역 호족세력의 반역 사건을 들 수 있다. 신라 경명왕 2년(918)년에, 궁예 휘하에 있던 왕건은 홍유·배현경·신숭겸·복지겸 등의 추대와 백성의 호응으로 궁예를 축출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당시 궁예를 따르던 세력의 반발도 커서 왕건은 개국하자마자 충격적인 반역사건을 겪는다.

 

공주·홍성 지역의 반란 사건은 왕건이 즉위한 지 5일 만에 일어났다. 고려왕조를 창업하고 왕건이 즉위하는 데 공로가 컸던 공주 출신 환선길이 일으킨 반란이었다. 환선길은 마군장군으로서 아우 향식과 함께 왕건을 추대하여 공을 세웠으나 논공행상에 불만을 갖고 반역을 도모했던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을 개국공신 복지겸이 미리 알고 태조에게 보고했으나 태조는 이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환선길이 동생 향식과 50여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궁전을 습격하여 왕건의 목숨을 노렸다. 그때 태조는 태연히 일어나 큰 목소리로 그들을 꾸짖었다. 여기에 환선길은 태조의 의연한 태도에 복병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도망치다가 호위군사들의 추격을 받아 동생 향식과 함께 처형당했다.

 

이 사건이 일어난 후 9일째, 즉 태조 즉위 14일째 되던 날에는 공주를 장악하고 있던 마군대장군 이흔암이 또 모반을 도모하다가 발각돼 처형되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이흔암의 처가 환씨인 점으로 미루어 이전에 있었던 환선길 모반사건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공주는 청주·강릉·철원과 함께 궁예의 강력한 지지 기반이었다. 그러나 환선길과 이흔암이 처형되자 2개월 뒤인 같은해 8월에 공주·홍성 등 10여 주·현이 함께 고려에 등을 돌리고 후백제로 투항해버린다. 원래 친궁예 세력인 공주는 두 모반 사건이 실패로 돌아가자 왕건의 지배하에서 보복이 두려워 후백제의 견훤에게 투항했을 가능성이 높다.

 

청주인들의 반란

 

청주 지역 출신 호족세력의 반역사건도 들여다보자. 청주는 원래 군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중요한 위치여서 삼국간에 치열한 공방을 벌였던 곳이었다. 그러다가 후삼국시대 효공왕 4년(900)년에는 궁예에게 자발적으로 귀부하여 고려에 편입된 지역이다.

 

청주 지역의 호족세력은 대개 몰락한 신라 진골귀족 계열로 신라왕실에 대하여 적대적이었는데, 궁예도 신라왕실로부터 버림을 받았던 관계로 둘은 쉽게 결합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 지역 출신 호족세력은 궁예정권의 강력한 지지 기반이었다. 일찍이 궁예는 효공왕 8년(904) 국호를 후고려에서 마진으로 고치고 그해 7월 그의 강력한 지지세력이 있던 청주의 민호 1천호, 즉 약 4천~5천명을 철원으로 이주시켰다. 다음해인 905년 송악에서 철원으로 도읍을 옮겨 전제왕권을 확립하고자 했다. 따라서 철원은 청주인을 기반으로 한 궁예의 본거지였다.

 

그런데 왕건이 나라를 세운 후 청주 인근 지역이 잇따라 후백제에 귀부해버리자 청주지역도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918년 9월에는 왕건의 도읍지인 철원에서 청주인 임춘길이 같은 고향 사람 배총규와 매곡인 경종 등과 모반을 일으켜 임춘길 일당이 처형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10월에 임춘길·경종 등의 주살에 대한 여파로 청주의 민심이 더욱 동요되는 상황에서 청주 호족세력인 진선이 그의 동생 선장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이렇게 태조는 즉위 후 약 4개월 사이에 환선길·이흔암의 모반사건, 공주·홍성 등 10여 주·현의 후백제 투항사건, 임춘길·진선의 반란사건을 연이어 겪었다. 그것은 왕건으로서는 생애 최대의 시련이기도 했다. 결국 자신의 정권 존립에 위협을 느낀 태조는 즉위 6개월 만에 수도를 궁예의 근거지였던 철원에서 자신의 근거지인 송악으로 옮긴다. 물론 왕건이 송악으로 천도한 직접적인 원인은 청주인들의 반역사건 때문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을 고려해볼 때 훈요십조 제8조는 이때 모반사건이 발생한 지역 혹은 반란 주모자의 출신지를 염두에 두고 그곳을 배역의 땅으로 지목했음이 분명하다.

 

태조 원년 9월에 청주인 현율을 순군낭중에 임명하자 배현경 등 개국공신들이 같은 청주인 임춘길 모반사건을 예로 들면서 병권을 장악하는 순군부에 현율이 임명되는 것을 반대했다. 이에 태조는 군사행정 업무만 관장하는 병부의 낭중에 현율을 임명했다. 모반지역 사람의 관직임명에 제한을 둔 한 예다.

 

또 목천현의 경우를 보면 태조가 고려 건국 후 목천 사람이 자주 배반하는 것을 미워하여 그 고을 사람들에게 우(牛)·상(象)·돈(豚)·장(獐)과 같은 짐승의 이름으로 성을 내린다. 반란이 심한 지역 사람을 짐승과 동일시한 조치이다. 따라서 이러한 것들을 고려해볼 때 훈요 제8조의 「차현이남 공주강외」란 홍성·공주·청주를 중심으로 한 그 인근 지역이 자연스럽게 설정된다.

 

그러면 배역의 땅으로 지목된 반란지역 주민들은 항상 불이익과 차별대우를 받았을까. 몇 가지 사례를 보면 그 지역 사람들에 대한 차별도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크게 보면 태조가 생각한 배역의 땅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태조는 홍성인 홍규의 딸을 12번째 부인, 즉 흥복원부인으로 삼았고 홍규를 삼중대광에 추증하였다. 또 견훤의 부하로 태조에게 끝까지 저항했던 홍성의 성주 긍준은 중용되어 대상이란 관직의 등급에까지 올랐다. 태조의 손자인 현종은 거란 침입 때 공주절도사로 있던 김은부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아 그의 맏딸을 원성왕후로 맞아들였으며, 후에 그녀의 동생 둘도 왕후인 원혜·원평으로 맞아들였다. 태조에 의해 짐승의 성을 부여받았던 목천 사람들은 문종 때 우(牛)는 우(于)로, 상(象)은 상(尙)으로, 돈(豚)은 돈(頓)으로, 장(獐)은 장(張)으로 복귀되었다. 이렇게 고려 왕조는 탕평책을 실시했던 것이다.

 

과연 금강은 배류수(背流水)였는가?

 

훈요십조 제8조에 차현이나 공주강(금강) 밖의 산형과 지세는 모두 배역한다고 했는데, 지금까지의 통념대로 금강 이남 전지역의 산수가 풍수지리학상으로 과연 배역의 땅인가. 우선 차현 이남 공주강 밖의 산세가 어디를 기준으로 배역하고 있는지, 그 기준이 되는 곳을 찾아야 한다.

 

훈요십조를 남긴 인물이 태조 왕건이므로 당연히 그 기준점은 고려의 수도가 있던 송악(지금의 개성)이 된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해석에 따르자면 차령과 금강 이남 후백제 지역이 개경을 기준으로 볼 때 산세가 배역으로 달린다는 것이다.

『고려사』 지리지 양주 황산강조를 보면 황산강(낙동강), 무안의 용진강(영산강), 광양의 섬진강을 3대 배류수(背流水)로 꼽았다. 개경에서 볼 때 세 강의 물줄기가 모두 국도 개경을 등지고 남해안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감안한다면 『고려사』 지리지의 배류수 설정은 지극히 타당하다.

 

그러나 금강은 호남 덕유산에서 발원하여 개성을 향해 북서쪽으로 흐르다가 공주 부근에서 방향을 돌려 남서쪽 서해로 빠져나가므로 개경을 등지고 흐르는 배류수가 될 수 없다.

 

금강을 배류수라고 보는 입장은 고려가 아니라 신라측 풍수지리설이다. 즉 경주를 기준으로 볼 때 금강은 비슷한 위도상에서 등을 보이며 흘러가므로 배류의 강이 된다. 『삼국유사』 기이편 김유신조에 나오는 역류지수(逆流之水)가 금강을 의미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금강은 고려의 배류수가 아니라 신라 경주를 기준으로 한 배류수임에 분명하다.

 

『동국여지승람』 권22 양산 황산강조에도 역시 고려에서는 무안의 용진강, 광양의 섬진강, 낙동강이 3대 배류수라고 명기하고 있다. 이렇게 배류수로서 고려사와 동국여지승람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은 금강이 언제부터 배류수로 지목되어 거기에 따른 그 지역 산세가 배역의 형세라고 낙인찍혀버렸을까.

 

성호 이익의 「이상한」 풍수설

 

그것은 아마도 이익(1681~1763)의 풍수관에서 이론화된 듯하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이렇게 말한다.

 

『공주강이란 금강을 이름하는데, 이 강은 호남 덕유산으로부터 흘러나와 역류하여 공주와 북쪽을 휘감아 금강으로 들어가고, 계룡산도 역시 덕유산의 일맥으로 임실 마이산을 거쳐 내룡(來龍)이 머리를 돌려 조산을 바라보는 공자(公字) 모양을 이룬다고 한다. 그래서 감여가는 금강을 소위 반궁수(反弓水)라 일컫는다』

 

이익은 금강 유역 일대의 지세를 북쪽 땅에 대한 배역의 형으로 보았다. 또 그는 경상도는 산수가 일일이 취합하여 풍성(風聲) 기습(氣習)이 모여 흩어지지 않고 명현이 배출되는 데 비하여, 전라도의 산수는 마치 산발체(散髮體)로 사방에 산주(散走)하여 국면을 이루지 않아서 재덕이 드물고 인정이 교악하다고 했다.

 

이익의 이와 같은 풍수관에 대해 필자는 다분히 조선 후기의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면서 정치적인 문제와 연루된 성호 개인의 주관적인 판단으로 보인다.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금강은 경주를 중심으로 했을 때 배류수가 되고, 개경을 기준으로 하면 낙동강, 섬진강, 영산강이 그것에 해당된다. 만약 개경을 기준으로 서해로 흘러들어가는 금강을 배류수로 한다면 개경 가까이에 있는 임진강·한강 모두 배류수가 되고 만다. 엄청난 모순이다. 그리고 호남지역에 대해 독설에 가득 찬 이익의 지방 편견을 보아도 그의 풍수관이 얼마나 주관적이고 왜곡되어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후 이중환(1690~1756)의 『택리지』에서 훈요 제8조의 차령이남 공주강외는 호남지역을 지칭하는 배역의 땅으로 확고부동한 정설로 정착되기에 이른다. 『택리지』 전라도조의 다음 기록이 그것을 잘 이야기해 준다.

 

『전라도는 동쪽으로 경상도, 북쪽으로는 충청도와 경계를 접했는데, 본래 백제지역이다.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 말에 이 지역을 점거하여 고려 태조를 여러 차례 공격하여 수차례 위태롭게 했다. 그후 고려가 평정한 다음 백제사람을 미워하여 차령 이남의 물은 모두 배류한다고 하여, 차령 이남의 사람은 쓰지 말라는 명을 남겼다. 중엽에 이르러서는 간혹 재상에 등용되기도 했으나 드물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와 마침내 이 금함이 풀어졌다』

 

이처럼 조선 후기에 들어와 풍수지리적으로 금강은 배류수이며 그 이남인 전라도는 배역의 땅인 관계로 그곳 사람들이 관직 임용에 차별받았다고 하는 해석이 굳어져 갔다. 그러나 북학파 실학자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이들의 논리에 대해 반박하고 나섰다.

 

그는 『풍수설이 근거 없음은 고금의 유명 유학자들이 이미 상세하게 말했다』고 하면서 풍수지리설 자체를 비판했고, 한국 실학의 집대성자로 평가되는 정약용은 『통색의』에서 지역간에 차별을 두고 그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는 것에 반대했다. 정약용은 『온 나라의 인재를 다 뽑아 올려도 오히려 부족할까 염려되는데, 하물며 그 열 가운데 여덟 아홉은 내쳐버리고 있다. 평안도·함경도·황해도·개성·강화 사람도 버린 자요, 강원도·전라도 사람도 반쯤 버린 자요, 버리지 않은 사람은 오직 문벌 좋은 수십 집뿐이다』라고 하면서 반지역차별론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나 그 후 일제시대 역사학자들이나, 한국 사학계에서는 차현 이남을 전라도 지역으로 설정하며 그것에 따라 제8조를 해석하는 데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무엇인가 석연치 않은 조항으로 궁색한 변명과 추측만 무성히 늘어놓았다. 이병도 박사는 위에서 본 『고려사』 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3대 배류수를 언급하며 『3대 배류수(낙동강·영산강·섬진강)가 고려조 어느 때에 시작한 사상인지는 자세하지 않으나 초기 사상은 아닌 듯하며, 초기에는 영남의 산수보다도 금강 이남 산수의 배역을 제1의 관심처로 했던 모양이다』라고 했다.

 

왕건은 과연 후백제인을 차별했나

 

지금까지의 통설대로 호남, 즉 후백제 지역이 배역의 땅이라고 한다면, 후백제 사람들은 고려조에서 차별을 받았어야 한다. 그러나 태조 왕건 주위에 개국공신·왕후· 중신· 선사 등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후백제 출신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먼저 태조의 왕후로 장화왕후 오씨를 들 수 있다. 그는 전남 나주인으로 혜종을 낳았다. 또 동산원부인 박씨는 전남 순천인으로 박영규의 딸이다. 흥복원부인 홍씨 역시 충남 홍성인으로 홍규의 딸이다.

 

태조의 중신으로는 신숭겸이 있다. 그는 전남 곡성인으로 왕건을 추대한 고려 개국 1등공신이다. 그는 태조 10년 대구 공산 전투에서 태조가 견훤의 병사에게 포위되었을 때 김락과 함께 태조를 구출하고 전사한 장군이다.

 

또 복지겸은 충남 면천인으로 왕건을 추대한 고려 1등 개국공신이다. 그는 환선길·임춘길의 모반을 적발하여 왕권의 안정을 가져왔다. 박술희도 충남 면천인으로 태조를 섬겨 대광의 관등에 올랐고, 태조로부터 훈요십조를 전해받았을 뿐만 아니라 태자 무, 즉 혜종의 후원자로 선정되었다.

 

최지몽은 전남 영암인으로 경사를 널리 섭렵하였고 특히 천문·복서에 정통하였다. 그는 태조 7년(924)부터 태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고 태조의 여러 정책에 자문하는 특별한 지위에 있었다. 한편 박영규는 전남 순천인으로 후백제의 장군이면서 견훤의 사위였다. 견훤이 아들 신검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당했다가 고려로 탈출하자 그도 고려 태조에게 귀부했고, 태조 19년(936)에 후백제를 멸망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유방헌은 전북 전주인으로 4대 광종부터 8대 헌종 때까지 제왕들을 충실히 보필한 충신이며, 과거시험관인 지공거를 두 번이나 역임하였다. 그는 비록 태조 왕건 때의 사람은 아니나, 태조 사후 후대에도 후백제인이 관직임용에 제한받지 않았음을 증명해 주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또 승려의 경우를 보더라도 마찬가지다. 풍수도참의 시조로 꼽히는 도선을 비롯해 형미·윤다·경보·경유·현휘 등 전라도 출신 승려들은 고려왕조에서 매우 각별한 예우를 받았다.

 

이렇게 태조 왕건은 타지역 출신 사람들과 차별없이 그의 주변에 후백제인 다수를 왕후·중신·고문 등으로 두고 있었다. 이것은 차현 이남 공주강 외 지역이 후백제 전역이 아니었음을 입증한다.

 

다음으로 태조 이후 후백제지역 사람이 과연 관직등용에 제한을 받았는지 검토해보자. 김성준 박사는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고려사』 열전을 중심으로 태조부터 인종 초까지 관인으로 등용된 사람을 도별로 통계를 내놓았다.

 

그 통계를 보면 1위는 경기도로 50명이 등용되었고, 27명이 등과하였다. 2위는 경상도로 36명이 등용되었고, 14명이 등과하였다. 3위는 황해도로 29명이 등용되었고, 9명이 등과하였다. 4위는 충청도로 22명이 등용되었고, 5명이 등과하였다. 5위는 전라도로 21명이 등용되었고, 10명이 등과하였다. 6위는 강원도로 15명이 등용되었고, 8명이 등과하였다.

 

이 통계에 따라 김박사는 차현 이남인으로 인종 초까지 등용된 사람은 21명(급제자 10명, 재상을 지낸 사람 12명, 수상에 오른 사람 3명)으로 나타나고 있어 태조의 훈요십조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으나, 차현 이남인인 전라도인이 타도에 비하여 훨씬 적은 감은 있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김박사의 해석은 차현 이남을 전라도 지역으로 설정하고 그 지역 사람들이 차별받았다는 어떤 선입관이 개재된 해석상의 오류다.

 

통계에서 보듯이 전라도인이 6개도 중 등용자가 5위인 것을 보면 언뜻 적어보인다. 그러나 그 수치를 면밀히 살펴보면 3·4·5위 사이의 등용인 차는 10명을 넘지 않고 있어서 이 수치로 전라도인이 차별받았다는 해석은 옳지 않다.

 

경기도인이 타도에 비해 등용인이 훨씬 많았던 것은 고려 태조 왕건의 본거지가 송악을 중심으로 한 곳이었기 때문이고, 경상도가 비교적 많은 관인을 배출하긴 했으나 그것이 타도와 현격한 격차를 보이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통계의 등용인 숫자는 태조의 훈요십조가 후백제인을 관직 등용에 제한하지 않았음을 잘 말해주고 있다.

 

김박사가 밝혔듯이 『고려사』 열전에 수록된 사람들도 관향을 알 수 없는 경우가 많고, 열전에 없는 사람은 거의 관향을 알 수 없는 실정이어서 이러한 통계수치는 본 연구에 그다지 적합한 자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 본관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본관·출생지·성장지가 각기 다를 경우 어느 곳 출신으로 해야 하는가 하는 어려움도 따른다. 한 예를 들면 신숭겸은 본관이 평산이고, 출생지는 곡성이며, 주로 성장한 곳은 춘천이었다.

 

왕건에게 끝까지 저항한 경상도

 

태조 왕건은 민족화합 정책을 폈다. 태조 십훈요의 제8조를 차현이남 옛 백제 지방인을 관직에 임명하지 말라고 해석할 경우, 각지의 호족들을 회유 포섭하며 민족융합과 통일의 정치이념을 펴려고 했던 태조의 기본 정치방향과 크게 어긋난다. 또 특정지역 사람을 배제하고 정치를 펴 나가라는 해석은 훈요십조의 다른 조항의 내용과 견주어 보아도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바로 이런 점을 꼬집어 일본인 이마니시는 후백제인을 관직에 임명하지 말라고 하는 제8조 해석은 태조의 기본 정치이념과 전혀 맞지 않기 때문에 십훈요가 후대에 위작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앞에서도 밝혔지만 태조가 배역의 땅으로 지목하며 후왕들에게 경계할 것을 당부한 지역 사람들은 즉위 후 모반사건이 집중적으로 일어났던 홍성·공주·청주 일대의 소규모 지역의 백성들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좀 경과한 후에는 그 지역 전 주민을 그 대상에 둔 것이 아니라 천민들의 집단 거주지인 향·부곡과 같은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로 제한하게 된다. 따라서 반왕건적인 성격의 지역도 시기가 지나면서 타지역에 비하여 특별히 차별받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사실상 왕건의 후삼국 통일 작업에 거세게 저항한 지역은 전라도가 아니었다. 통설에 따르면 태조 왕건이 제8조를 남기게 되었던 원인이 신라는 순순히 귀부한 반면 후백제는 끝까지 왕건에게 대항하여 후백제 통합 과정이 힘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의 역사적 정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잘못된 결론이다.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고려와 후백제의 제일선이었던 충청도 방면의 전선을 보면 양국 모두 자국의 안위를 좌우하는 정면의 전선이어서 예상보다 큰 전투나 변동이 적었다. 충청도 방면 전선에서는 서로 방어에 주력하였기 때문에 공주·홍성을 연결하는 전선 부근에서 약간의 진퇴가 있었을 뿐 큰 변화없이 비교적 균형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경상도 쪽의 전선은 양국이 주도권을 잡기 위하여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특히 상주·안동·성주·합천·진주 부근은 자주 격전이 벌어진 곳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한 곳이 상주·안동 부근이었다. 태조 13년 안동 전투에서 왕건이 승리하자 영안·하곡·진명·송생 등 30여군이 고려로 항복해왔다. 또 태조 10년 9월의 대구 공산동수 전투는 신숭겸·김락이 전사하고 태조가 겨우 목숨을 건진 치열한 전투였다.

 

935년 11월 신라 경순왕이 태조 왕건에게 귀부한 것은 경주 한 지역이 투항한 것에 불과했고 경상도 지역 곳곳에서의 전투는 패권의 향방을 가를 수도 있는 대격전이었다. 따라서 통일과정에 끝까지 저항하며 격전을 벌인 지역은 전라도가 아니었다.

 

누구의 「장난」 때문인가?

 

이제 마무리를 지어보자. 지역갈등의 원천으로 작용해왔던 훈요십조 제8조의 「차현이남 공주강외」는 기존 해석대로 차령 이남 전체를 가리킨 것이 아니라 차령을 북쪽 경계선으로 하고 금강을 남쪽 경계선으로 하는 홍성·공주·청주 일대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왕건이 이 지역을 배역의 땅으로 지목하면서, 그곳 사람들을 관직에 등용하지 말도록 당부한 이유는 즉위 초기 친궁예적인 그 지역에서 잇따라 모반사건이 일어나며 왕건의 정치기반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곳도 몇십년 후에는 그다지 큰 차별대우를 받지 않고 회복되었다. 태조 왕건을 보좌하는 후백제인 다수가 있었던 점이나, 풍수지리설, 관리임명 실태, 왕건의 정치이념을 살펴보아도 태조가 지적한 차현 이남은 전라도 지역이 아니었고, 그곳 주민들이 차별대우도 받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조선 후기 이익의 『성호사설』이나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주관적 풍수설에 의한 지방편견이 있기도 하였지만, 박제가·정약용 같은 후기 실학자들은 반풍수론을 주장하며 지역차별을 반대했다.

 

그러나 일제시대 식민사학자들이 그 해석을 왜곡하기 시작하면서 훈요십조 중 제8조는 지금까지 지역갈등의 원천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태조의 통일정책이 민족의 평화와 화합을 기본 원칙으로 한 것임을 상기하면 훈요십조 중 제8조의 해석은 반드시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 근거 없는 허상에 사로잡혀 소모적인 국력낭비를 해오지 않았는가 싶다. IMF시대를 맞아, 그리고 21세기를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점에서 이제는 영호남 지역갈등의 허구를 꿰뚫어볼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