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 23일 화요일

남도여행 마지막날 (2) - 식영정 / 환벽당 / 취가정

점점 높아져가는 햇빛에 서서히 말라가는 아침 대기를 느끼며 소쇄원을 나선다.

한 가족이 우리의 뒤를 이어 소쇄원으로 들어간다.

그네들에게 소쇄원은 어찌 다가올까.....

궁금증을 뒤로 하고 다시 차에 오른다.

 

소쇄원 근처에는 남도 가사문학관련된 여러 정자들이 산재해 있다. 식영정을 위시하여 광주호 근처에 남아있는 정자뿐만 아니라, 좀 더 담양가는 쪽으로 나가면 조선 가사의 대가, 송강 정철의 손길이 남아있는 송강정이나, 송강 정철의 성산별곡에 많은 영향을 준 송순의 면앙정 등 익히 들어 유명한 정자들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어 나그네들로 하여금 어디를 들려야 할지 행복한 고민에 빠져들게 만든다. 그 가운데, 이번 여행에서는 송강정이나 면앙정과 같이 많이 알려진 곳 보다는 좀 덜 알려진 곳들을 위주로 살펴보았다. 이런 데에는....+.+ 차를 가져왔다는 것이 가장 주요 원인이었으니... 게다가 여행 직전에 먼지 툴툴 털어 꺼내어 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남도정자문화 부분의 다음 정자들에 대한 설명이 주효했다....그리하여 접하게 된 남도 가사 문학의 정수를 담고 있는 곳 - 식영정 / 환벽당 / 취가정이다.  

 
1. 식영정 息影亭

 

 

     "엇던 디날 손이 성산()의 머물며서, 서하당() 식영정() 주인아 내말 듯소, 인생 세간()의 됴흔 일 하건마난......."                            - 정철의 "성산별곡 星山別曲" 중에서..

 잊고 있었던 성산별곡의 첫 구절이다. 아..식영정...그래서 그리 익숙하게 느껴졌구나. 소쇄원에서 나와 다시 광주호 쪽으로 5분 정도 (차로) 내려오다 보면 오른쪽에 최근에 지은듯한 "가사문학관"이 있고, 그 바로 옆에 식영정이 있다. 식영정이란 푯말은 있건만, 가사문학관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을 뿐더러 소나무 숲에 가려진 이 정자는 쉬이 지나쳐버릴 수도 있는 곳. 아침나절 차량 통행이 그닥 많지 않았던 시간인지라 길가에 염치불구 차를 세우고, 식영정쪽으로 난 계단을 오른다.

 "식영정은 환벽당, 송강정과 함께 정송강유적이라고 불린다. 식영정은 원래 16세기 중반 서하당() 김성원()이 스승이자 장인인 석천 임억령()을 위해 지은 정자라고 한다. 식영정이라는 이름은 임억령이 지었는데 ‘그림자가 쉬고 있는 정자’라는 뜻이다. [이와 관련된 일화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와 소쇄원 홈페이지 주변 볼거리에도 나와있으니 참조하시길...]

 식영정 바로 옆에는 김성원이 자신의 호를 따서 서하당이라고 이름 붙인 또 다른 정자를 지었는데, 없어졌다가 최근 복원되었다. [ 처음엔 서하당이 식영정인줄 알았다. 뭔가 꽤 오래된 건물이 있긴 한데 이건 무얼까..하고 가까이 가서야 알아봤다;;; 자그마한 표지판이 있긴 한데 이곳도 자칫했다가 그냥 지나칠 뻔..그래서 사진도 제대로 못 찍고 와버렸다..ㅠ.ㅜ 흑..꽤나 멋진 정자더구만...제대로 설명표지판이 있어줬으면...]

김성원은 정철의 처외재당숙으로 정철보다 11년이나 연상이었으나, 정철이 이곳 성산에 와 있을 때 환벽당에서 같이 공부하던 동문이다. 식영정 건너편에 있는 환벽당은 어린 시절 정철의 운명을 바꾸어놓게 한 사촌 김윤제가 기거했던 곳이다.

 당시 사람들은 임억령, 김성원, 고경명(), 정철 네 사람을 ‘식영정 사선()’ 이라 불렀는데, 이들이 성산의 경치 좋은 20곳을 택하여 20수씩 모두 80수의 식영정이십영()을 지은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이 식영정이십영은 후에 정철의 《성산별곡》의 밑바탕이 되었다.

 정자의 규모는 정면 2칸, 측면 2칸이고 단층 팔작지붕이며, 온돌방과 대청이 절반씩 차지한다. 가운데 방을 배치하는 일반 정자들과 달리 한쪽 귀퉁이에 방을 두고, 앞면과 옆면을 마루로 깐 것이 특이하다. 자연석 기단 위에 두리기둥[]을 세운 굴도리 5량의 헛집구조이다.

 주변에는 정철이 김성원과 함께 노닐던 자미탄(), 노자암, 견로암, 방초주(), 조대(), 서석대() 등 경치가 뛰어난 곳이 여러 곳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광주호의 준공으로 거의 물 속에 잠겨버렸다. [다른건 몰라도 자미탄은 보고팠는데, 환벽당 바로 앞에 있는 것이 자미탄이 아닐까......혼자 그냥 지레짐작해본다;;;; ]                                          

                                                                                  - 네이버 "식영정" 검색 글에서...

 

 

[아침 나절 아직 밥을 아니 먹었기에 표정이 영;;;]

식영정 툇마루에 잠시 앉았다. 바로 뒤에는 온돌방이고 사면을 탁트인 툇마루로 둘러쌓인 곳. 사실 이 곳에서는 광주호가 보일까나..했는데, 아부지 왈 "바부..이거 지어질 때는 광주호 있지도 않았당께!" ....그렇구마이~~~  =.=;;

소쇄원 홈페이지에서도 주변 주요 정자라하여 식영정이 소개되어 있다. 이런저런 많은 이들의 추억이 서린 곳이어서 그럴까..오래된 툇마루에서 온기가 느껴진다...

 

 

지친 나보다 앞서 훌쩍 혼자 미리 올라가 식영정 마루에 앉아 경치구경하던 동생녀석. 갸도 아침을 아니 먹어 꾸루룩~ 할텐데 카메라를 들이대니 포즈를;;; 그나마 야 찍은 사진에서야 식영정 글씨가 보이누나.. 여름인지라 온돌방의 문을 천정에 매달아 놓아 내부가 시원해 보였다. 지어진지 오래된 건물인지라 여기저기 최근 손을 본 흔적이 있어 좀....아쉬웠지만, 그래도 색바랜 기둥이나 곧지 않고 휘어진 모습 그대로의 대들보들이 정겹더라...나도 언젠가 이렇게 공기맑고 경치좋은 곳에 나만의 공간을 가질 수 있을까......?

 

 

유홍준 현 문화재청장의 희대의 베스트셀러(!)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식영정 파트를 보면, 그 뒷편에 서 있는 높디높은 소나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여행 전날 그 부분을 읽으며 '나도 가면 꼭 소나무 기둥(!) 한 번 어루만져주고 와야지!' 했는데... 어루만져주긴 했지만...책에 써있던대로 소나무 앞에 있는 '주변 풍경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괴상망측한(!) 푯말은 영 눈에 거슬린다. 굳이 세워야 했다면 좀 더 옆에다가 세워도 되지 않았을까... 괜시리 멀쩡하게 잘 서있는 소나무에게 미안하다. 그 아래 뭔 시비도 있는데, (성산별곡 시비던가..할거다 아마. =.= 내용을 보기도 전에 그 존재 자체에 '허걱~' 하야 그냥 발길을 돌려버렸으니...) 흠..무엇이든 뭔가를 세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좀 자제해도 되지 않을까...식영정에도 미안한 마음이 든다....


 


이는 식영정 정면을 가득 메운 소나무들에게도 마찬가지.
사실 식영정을 올라가면 맨 위 사진처럼 식영정의 옆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오고 앞면을 보기 위해 몸을 돌리면...위의 소나무들이 눈에 들어오는데....=.= 그 앞을 주욱 그어놓은 철봉펜스 [...뭐라고 해야하는지 정확한 용어를 모르겠다 =.=;;], 그리고 안쓰러워 보이는 쓰레기통.. 식영정 바로 앞 경사가 좀 있긴 하던데, 안전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서 뭔가를 세워야 했다면 좀 더 주변경치와 조화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순 없었던 걸까....그리고 그 쓰레기통.. =.=;; 물론 식영정 계단 오르기 바로 전에 음료수 자판기가 있긴 하더라. [...그런 곳에 왜 자판기가 있어야 하는 건지도 이해가 잘 안 가지만..] 식영정 주변 환경정화를 위한다면 그 자판기 옆에 쓰레기통을 놔두는게 더 현실적이지 않을까...?? [...아닌가..? =.=;;] 여하튼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여기저기 녹슨 철봉들과 삐끄덕 삐끄덕 쓰러지기 일보직전의 쓰레기통은 여간 안쓰러운게 아니다. 식영정도 그냥 맘편하게 자기 앞에 펼쳐진 소나무숲을 보고싶어하지 않을까...?? 소나무 숲에서 솔솔 풍겨오는 솔잎에 날카로운 쇳가루 내음이 섞이는건 나도 원하지 않는데....
 
[사진 속 물이 광주호인줄로 알았다;;; =.= 광주호가 아닌 걸 안 후에는 '엇 자미탄이야!!!?????' 했는데....그 앞을 흘러 광주호로 흘러가는 내천 중 하나란다. 쩝.. ]
 
 
식영정을 내려오면서 계단에서 아부지가 한 컷~! 아래에서 볼 땐 이 소나무가 이리 큰지 몰랐는데, 식영정 바로 옆에서 보면 정말 엄청 크더라...수 백년 동안 이 자리에서 잘 자란 나무일텐데..앞으로도 곧이곧게 잘 자라으면.. 소쇄원과는 달리 식영정은 많은 관광객들을 잡아두는 곳은 아닌 듯 하야 [잠시 머무는 과객들은 많겠지...] 심한 훼손은 그나마 피할 수 있으려나...그래도 식영정과 그 앞 소나무 숲을 가로질러 나눠버린 철봉은 철거되었으면 좋겠다.....
 
 
 
 
 

2. 환벽당 環碧堂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다르면, 식영정에서 내려와 조금만 걸어가면 환벽당에 갈 수 있다고 하였다. 운좋게도(!) 지나오다 환벽당 표지판을 본 뒤라 여유롭게 걸어가려했건만, =.=;; 울아부지 차 갖고 가야한단다...아직은 이른 시간이라 차 세워놔도 괜찮을듯 싶더니만..정확히 어딘지 모르니 차 갖고가자 하셔서 차에 오르긴 했는데..~.~ 앞으로 우리 갔던 코스와 비슷하게 근방 정자도실 분들...차는 그냥 한 군데 세워놓고 걸어가십쇼..특히 환벽당 가는 길은 전형적인 시골길이기 때문에 좁기도 하거니와 비온 후 가면 진흙탕이요... 그냥 걸어가면 될 것을...아부지의 그 고집을 누가 말릴쏘냐...이른 아침 논일하러 나온 차들과 뒤엉켜 참 민망해져 버린 상황을 어찌저찌 해결하고 결국은 길가에 차 세워놓고(!) 논사이로 난 길을 따라 환벽당 앞에 다다랐다.
 
무논 사이에 솟은 자그마한 언덕위에 세워진 듯 한데, 길을 따라 구불구불 작은 돌담이 둘러져있다. 그 사이에 난 자그만한 문. 여기가 환벽당 오르는 길이다. 그리고 그 바로 앞에 세워진 돌비석 하나. 가까이서 보니 "성산별곡"의 한 귀절이 적혀져 있다.  
 
".......짝마잔 늘근솔란 조대(釣臺)예 셰져두고 그아래 배랄띄워 갈대로 더져두니 홍료화백빈주어나 사이 디나관대 환벽당(環碧堂) 용의 소히 배 넌패 다핫나니....."
// 한 쌍의 늙은 소나무를 조대에 세워 놓고, 그 아래에 배를 띄워 가는 대로 내버려 두니,
홍료화 백반주를 어느 사이에 지났길래. 환벽당 용의 못이 뱃머리에 닿았구나.

                                                                                    - 정철의 "성산별곡" 중에서...

 

오호라~ +.+ 이곳도 성산별곡에 나오는 곳이구나~~! 성산별곡을 배운지 정말 오래되었긴 하나보다 ^^;; 환벽당은 잘 생각이 나지 않았건만.. 역시 난 가사문학의 한복판에 서 있는게야...예전에 배웠던 것을 몸소 체험하고 있다는 생각에 한껏 들뜬다. 비석을 보면서 바로 옆 얕은 개천 표면에 가득한 개구리밥을 구경한다. 여기가 정철과 김윤제의 인연이 시작된 용소였을까?? 혹시 여기가 자미탄 아닐까?? ^~^ 왠지모를 설레는 마음을 안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식영정도 그렇고 환벽당도 그렇고 그리 높지 않은 야트막한 동산에 세워진 정자들..자그마하지만 정자가 풍기는 풍취는 그야말로 최고인 곳들...그네들이 자연 속에서 내뿜는 대기가 그저 상쾌하다..

 

특히 이 환벽당..이름 그대로 "푸르름에 둘러쌓인 집"..은 소나무 숲 사이로 내천이 보이던 식영정이나 바로 옆에 계곡을 끼고 있는 소쇄원의 제월당이나 광풍각과는 달리, 정말 100000% 질릴만큼 순수하고 짙은 "녹음에 둘러쌓인" 곳이다.

 

 1972년 1월 29일 광주광역시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광주광역시 북구 광주호 상류 창계천가의 충효동쪽 언덕 위에 있는 정자로, 나주목사(使)를 지낸 김윤제(:1501∼1572)가 낙향하여 창건하고 육영()에 힘쓰던 곳이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목조와가()이며, 당호는 신잠()이 지었다. 송시열이 쓴 제액()이 걸려 있고,[@.@ 소쇄원 담장글도 송시열의 글이었건만....]  임억령()·조자이()의 시가 현판으로 걸려 있다.

 김윤제는 광주광역시 충효리 태생으로, 호는 사촌()이다. 1528년 진사가 되고, 1532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다. 그후 나주목사 등 13개 고을의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관직을 떠난 뒤 고향으로 돌아와 환벽당을 짓고 후학 양성에 힘을 썼다.

 그의 제자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정철()과 김성원() 등이 있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김덕령김덕보 형제는 그의 종손으로 역시 김윤제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특히, 정철은 16세 때부터 27세에 관계에 나갈 때까지 환벽당에 머물면서 학문을 닦았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환벽당 아래에 있는 조대()와 용소()는 김윤제가 어린 정철을 처음 만난 사연이 전하는 곳이다. 조부의 묘가 있는 고향 담양에 내려와 살고 있던 당시 14살의 정철이 순천에 사는 형을 만나러 길을 가던 도중에 환벽당 앞을 지나게 되었다. 때마침 김윤제가 환벽당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꿈에 창계천의 용소에서 용 한마리가 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꿈을 깬 후 용소로 내려가 보니 용모가 비범한 소년이 멱을 감고 있었다. 김윤제는 소년을 데려다가 여러 가지 문답을 하는 사이에 그의 영특함을 알게 되었다. 그는 순천에 가는 것을 만류하고 슬하에 두어 학문을 닦게 하였다.

 정철은 이 곳에서 김인후(), 기대승() 등 명현들을 만나 그들에게서 학문과 시를 배웠다. 후에 김윤제는 그를 외손녀와 혼인을 하게 하고 그가 27세로 관계에 진출할 때까지 모든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환벽당 인근에 취가정, 독수정, 소쇄원이 있다. 환벽당은 정철의 4대손 정수환()이 김윤제의 후손으로부터 사들여 현재 연일 정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 네이버 "환벽당" 검색에서..

 

환벽당 현판이 걸린 바로 정면에서 바라보면 그리 높지않은 동산의 아래가 좌르르르륵 펼쳐진다. =.= 정말 푸르름밖에 없다!!!!!!

저 둘레둘레 살짝쿵 보이는 돌담 안 환벽당의 모든 '안마당'들은 정말 모두 "푸른 녹음"이다. 숨막힐 정도의 녹음이 꽉찬 곳이 바로 환벽당. =.=;;; 정말 파랗다......오히려 하늘이 간신히 보일듯한 푸르름이 압박스럽게 다가오건만....

약간은 허한(!) 기분이 들어 툇마루에 앉았다. 잠시 앉아있는데...

순간 녹음의 고요

푸르른 내음

날 덮친다.

아.....

온 몸이 가벼워지는 듯한 느낌.

우리나라 정자에 앉으면 뭔가가 보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휩쌓여 있었던걸까.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그저 앉아 있는 것 만으로도 이렇게 위안이 되는 것을....

이 곳은 김윤제가 후학양성을 위해 지은 곳. 공부를 위한 곳인만큼 집중을 해야하는 곳이다..나의 짧은 어리석음이 순간 부끄러워진다....

 

동생은 여유만만.. ^^ 오히려 별 생각없이 환벽당을 접한 녀석이 선입견없이 이 곳의 자연풍광과 정자의 시원함을 더 느끼는가 보다. 이런 곳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 녀석인줄 알았건만, 가져간 정자들 소개글들을 훑어보기도 하고 이런저런 소개표지판을 살펴보기도 하고 ^^

살짝쿵 환벽당의 반대편으로 가봤는데, 엇..툇마루에 나물들이 널려져있다. ....사람이 사는거야..? @.@ 한쪽 벽에는 몇몇 농기구가 걸려있기도.. ....이거 문화재 아냐?? 이렇게 해도 되는건가..? 할때 반대쪽 돌담의 또다른 쪽문에서 할머니 한 분이 나오신다. 아아...여기도 소쇄원처럼 개인 가문에 내려온 정자구나..+.+ 멋진걸~~~!!!! 식영정에서 봤던, 경치를 삭막하게 만든 철봉이 아닌, 자연스레 툇마루에 올려져 햇빛의 따사로움을 한껏 받고 있는 나물들과 환벽당에 드리워진 녹음의 그늘...+.+ 정답다..

 

할머니께서 길을 알려주셔서 남은 한 곳, 취가정 가는 방법을 알았다. 그런데 환벽당에서 정면을 보니 기와집이 보이네..=.=;; 저기구만유... ^^;;  이제 남도 정자문화 답사(!..이름도 거창하여라..)의 마지막 코스~!!!! 취가정이다.

더 가고팠지만..ㅠ.ㅜ 앞으로의 일정이 아직 더 남아 있어서 부득이 발걸음을 돌린다..흑...언젠가 친구들과 백과사전(!) 갖고 와서 이 일대 정자들을 모두 돌리라!!!! @.@

  

3. 취가정 醉歌亭

 


취가정 올라가는 길.

환벽당 바로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보이긴 했지만...환벽당 시비를 제대로 못 본 아부지한테 용소와 함께 설명해드릴려고 다시 돌담길로 나왔다. 오른쪽으로 돌담을 끼고 왼쪽으로는 용소의 그 자그마한 내천을 끼고 걷기 시작하여 5분도 채 안 되어 취가정 오르는 길에 도착하였다. 환벽당과 마주보고 서 있는 곳인지라, 역시나 그닥 높지 않다. 쉬엄쉬엄 덩쿨이 여러 번 둘러쳐진 돌계단을 오른다. 이곳은 가사문학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곳은 아니라고 알고 있지만, 취가정 이라는 정자 이름을 짓게 된 '김덕령' 장군의 이름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기에...이순신 장군과도 인연이 있는 장군이기에..^^:;  정말로 작은 정자였지만, 이 정자를 기억하게 만든 독특한(!) 경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충장공 김덕령()이 출생한 곳으로서 환벽당 남쪽 언덕 위에 있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김덕령의 혼을 위로하고 그의 충정을 기리기 위하여 1890년(고종 27년) 후손 김만식() 등이 세웠다. 6·25전쟁으로 불탄 것을 1955년 재건하였다.

주변 정자들 가운데 가장 늦게, 얕으막한 산 위에 누대처럼 지었는데, 대부분의 정자들이 강변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과 달리 넓게 펼쳐진 논과 밭들을 향하여 세웠다. 정자 앞에 서 있는 소나무는 정자의 운치를 한결 더해준다.

정자의 이름은
정철의 제자였던 석주 권필(:1569∼1612)의 꿈에서 비롯하였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은 김덕령이 꿈에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하고 한맺힌 노래 《취시가()》를 부르자, 권필이 이에 화답하는 시를 지어 원혼을 달랬다고 한다.
                                                                                 - 네이버 '취가정' 검색 중에서....

 

 

좁다라지만 정겨운 돌계단을 밟고 올라가는데, 저 멀리 취가정의 기와가 보이면서 어떤 꼬마애 머리가 쏘옥 올라왔다가 사라진다. ...애들이 있나봐~ 하나 둘....=.= 꽤 많네..동네 소풍인거야..?? 끄어.... 약간은 불안한 마음을 안고 올라간 취가정은...

그러나 우리들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펼쳐졌다.

 

때는 8월 말. 서서히 더위가 꺽이고 아이들의 방학이 끝날 무렵이건만...오손도손 모여있는 아이들이 그 조그마한 손으로 먹을 갈아 화선지 위에 쓰고 있는 것은 "천자문". 그리고 방 한가운데에 앉아계신 훈장 할아버지..

 

@.@ ..동네 서당인것이야????

환벽당도 그렇고, 취가정도 그렇고 한 마을의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어서일까... 문화재이건만 자신들의 생활 속에 한껏 품어안고 살아가는 그네들의 모습이 그저 놀랍고 부러웠다. 그네들에겐 별거 아닌 일상일 수도 있겠지만, 도시의 회색벽에만 익숙한 나에겐 그네들의 그런 풍경은 정말 신선한 충격 그 자체! 스무 명 가량의 아이들이 우리들이 온 것에도 그닥 도용하지 않고 자기가 오늘 써야 할 천자문 여덟글자 [-.- (검을현 누를황) 집우 집주 넓을현 거칠황 날일 달월 찰영 기울축....이정도 였던 걸로 기억한다..천자문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되는 듯..]를 열심히 훈장 할아버지 앞에서 쓰는 모습은 정말 귀여웠다. ^~^ 우리의 출연에도 아랑곳 하지 않는건 훈장 할아버지도 마찬가지. 갓쓰고 도포자락 휘날리시는 모습은 아니었지만, 편안 옷 차림에 동네 꼬마들에게 한자를 가르치시는 모습은 참 좋아 보이더라.. ^^ 그렇게 천자문 삼매경에 빠진 그네들 덕(!)에 어째 이번엔 툇마루에 앉아 보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건물을 제대로 찍지도 못했다. ^^;; 하하하 조용히 글씨를 쓰면서도 정자를 구경하는 우리들을 쫓는 그네들 초롱초롱 눈망울에 수업을 방해하기 싫어 그저 현판만....흠... 사진을 못 찍어 아쉽긴 하지만 ^^ 마음 한 켠에 계속 취가정을 담아둘 수 있는 좋은 추억거리를 안겨 주었으니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지 않을까..

 


조용조용 목소리를 낮추며 취가정을 돌아보다가...그만 아쉬운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ㅠ.ㅜ 위 네이버 설명에도 있고,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도 나와있듯이, 취가정의 백미는 정자 바로 앞에 서 있는 S형의 소나무라고 되어 있건만.......이 소나무를 쓰다듬는 것으로 이번 남도 정자기행의 대미를 장식하려 했건만.....ㅠ.ㅜ 그 동안 소나무가 죽은 것일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내가 만난 취가정 앞 소나무는 이렇게 잘려져 있었다.....ㅠ.ㅜ

 

 

 

 

...혹여라도 우리가 다른 소나무를 본 게 아닐까..했지만,  "답사기" 실린 흑백사진을 참조해 봤을 때도..이 나무가 틀림없다..ㅠ.ㅜ 이럴수가...... 아이들 수업만 아니었더라면 훈장 할아버지한테 어찌된 일인지 여쭤볼 수 있었으련만...나와 같이 책을 보면서 한껏 부풀어 올랐던 울 아부지도 약간 상심하신 듯....엉엉엉...아쉽긴 하지만, 주변에 흐드러지게 핀 금낭화가 아침 햇빛 받고 밝은 미소를 띄워준 것으로, 독특한 기억을 심어준 취가정의 서당 모습에 위안을 삼는다....

 

 

  

상당히 많이 아쉽긴 하지만....저 소나무가 만약 책에서 언급한 소나무가 맞다면 [...지금도 우리 일행에 소나무를 잘 못 알고 있었더라면 하고 빈다.ㅠㅜ] 괜히 엄한 손질 하지 말고 그냥 저 모습 그대로 놔두었으면 좋겠다. 취가정 앞 소나무의 고풍스런 모습을 직접 맛보진 못하더라 하더라도, 자연스레 고사한 나무의 모습을 보는게 낫지, 어떤 식으로든 인공적인 손때가 뭍혀지는걸 원치 않기에...그저 저 모습 그대로 취가정 앞에 남아있었으면 좋겠다.....

 

취가정을 한 바퀴 돈 후, [사실 ^^;; 아이들이 있어서 제대로 돌아보진 못했다;;] 떠나기 직전, 파란 하늘이 열리기 시작한다. 아침나절의 가볍고 차가운 공기는 많이 따뜻해졌고, 풍광은 햇빛을 받아 더더욱 녹음의 위용을 떨친다..

 

  

취가정에서 내려오기 직전, 그 앞에 세워진 김덕령 장군과 권필의 시가 새겨진 시비를 둘러본다..

한자와 한글로 씌여 있었는데 아쉬운 마음을 달래고 싶었는지, 아부지와 난 한동안 시비에 서서 한시를 감상하였다...

 

 

한잔하고 부르는

노래 한 곡조

듣는 사람 아무도 없네.

나는 꽃이나 달에

취하고 싶지도 않고

나는 공훈을

세우고 싶지도 않아

꽃과 달에 취하는

것 또한 뜬구름

한잔하고 부르는

노래 한 곡조

이 노래 아는 사람

아무도 없네.

 

 

 

술에 취해서 홀로 노래 부르는 곳... 내가 만난 취가정은 외로움을 읊었던 곳이 아니라, 천진한 아이들의 살뜰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던 그런 곳이었다. 김덕령 장군의 외로운 원혼은 이제 위안을 얻었을까....억울한 죽음을 당한 그였지만, 자신의 죽음을 토로하는 이런 멋진 시를 남긴 그의 자취에 어느새 내가 취한다....

 

머리위로 내리쬐는 햇볕이 이제 뜨거워지기 시작한다. 자미탄이었을 법한 개구리밥 그득한 내천을 지나 차로 발길을 돌린다. 원체 이런 옛정자들을 돌아보길 좋아하는 본인인지라 아침나절 돌아본 정자들이 들려준 녹음의 이야기가 살갑다. 정자들이 품어준 상쾌한 대기가 온몸을 적신다. 미니녀석도 그리 싫진 않은 눈치다. 그래...네게도 도시의 답답함을 털어내버릴 계기가 필요했겠지. 한껏 두 눈에 넘치도록 담기는 녹음의 그림자는 아무리 주워담아도 질리지 않다. 자연 본연의 색이란 이리도 강렬한 것이었단 말인가.... 그날 담양/광주 근처 자그마한 정자들이 우리에게 들려준 푸르른 이야기풀내음 가득한 공기는 오래토록 잃지 않으리라....

 

갈 길 바쁜 과객들이 다른 정자에까지 둘러보지 못하는 아쉬운 발걸음을 돌린다.

소쇄원에서 좀 더 들어가면 있다던 독수정을 들르지 못하고 가는 발걸음이 못내 아쉽지만..언젠가 또 한 번 마음통하는 친구들과 이 길을 다시 걸으리라. 그들과 함께 이 곳의 푸른 이야기들을 다시 한 번 들으며 풀내음 가득한 시원한 바람결에 지친 발걸음 쉬어 가리니....

 

이제 우리의 발걸음은 담양 대나무숲으로 향한다...

 

                                                                                            .... to be continued.....

                                      

 

덧> 성산별곡 星山別曲 전문 보러 가기~!




출처 rani's ORCHID ROOM | 뿌까
원본 http://blog.naver.com/spikebebob/12001825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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