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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19일 금요일

'표해록'의 주인공, 홍어장사 '문순득'

'표해록'의 주인공, 홍어장사 '문순득'

 

'표해록(漂海錄)' 이라는 제목의 책은 현재까지 3종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하나는 탐진출신의 최부가 남긴 것과 제주출신의 장한철이 남긴 표해록, 그리고 정약전 선생이 저술한 표해록이다. 최부의 표해록이나 장한철의 표해록은 잘 알려져 있으나 정약전 선생이 우이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저술한 표해록은 비교적 늦게 그 존재가 알려져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 표해록의 주인공이 '문순득(文淳得)'이란 사람으로 홍어장사였다. 정약전 선생이 홍어장사인 문순득의 표류생활을 생생하게 엮은 책으로 표해시말(漂海始末)이라는 제목으로 되어있다. 대대로 우이도에 살고있는 문순득의 5대손인 문채옥씨 집에 소장되어 내려온 여러 문건 중에 단지 저술되었다는 사실 외에 원본의 실체가 없었던 표해록이 뒤 늦게 발견되어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표해시말(漂海始末)이란 제목의 문순득 표해록
 
'문순득', 이 사람은 1777년에서 1847년까지 조선후기를 살았던 실존인물로 본관은 나주 문씨이다. 당시에도 홍어는 서남해를 대표하는 어종(魚種)이었고 이런 홍어를 전문적으로 뭍과 유통하며 장사하던 이가 바로 문순득이다. 향토음식으로 7백 여 년이 넘는 홍어의 역사이지만 기록상으로나 구전으로 알려진 바로 최초로 홍어와 연관되어 나오는 이름 석자가 이 문순득이란 인물이다. 문순득과 표해록에 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온다.
 
(·····) 나주(羅州) 흑산도(黑山島) 사람 문순득(文順得)이 여송국(呂宋國,필리핀)에 표류한 일이 있는 바, 그 곳 사람의 형모(形貌)와 의관(衣冠)을 보고하고 그 나라의 방언(方言)을 기록하여 가지고 왔었다.(·····) - 순조9년(1809) 6월 26일
  
지금의 신안군 도초면인 우이도는 조선시대에 소흑산도로 불리우고 있었다. 이 섬에서 배를 두척을 부리던 문순득은 큰 배는 홍어를 잡고 작은 배는 잡은 홍어를 싣고 그때나 지금이나 홍어로 유명한 나주 영산포에 내다 팔았다. 돌아오는 길에는 빈배로 가지않고 쌀과 곡식을 사 양식이 귀한 섬에 되 파는 장사를 하며 살던 문순득이 인생의 큰 전기(轉機)를 맞는다.

 
▲우이도의 옛 부두, 여기서 문순득은 출항과 귀항을 하였을 것이다.
 
문순득의 나이가 25살 때인 지금으로부터 2백년전인 1801년 12월의 어느 겨울날, 대흑산도 남쪽의 태사도에서 홍어를 사서 싣고 돌아오다 사나운 풍랑에 동네 선원들과 함께 타고 있던 배가 표류를 하게 된다.
 
이 때 문순득은 오키나와를 거쳐 필리핀에 다다르게 된다. 1805년 1월 8일에 중국을 통해 집에 무사히 돌아오기까지 무려 3년2개월의 시간이 걸린 본의 아닌 여정(旅程)이었다.
 
이미 일본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받아 단행본으로 발간된 표해록은 문순득이 해류에 밀려 제일 먼저 기착 한 곳이 오키나와(유구국,琉球國)이다. 이 곳에서 문순득은 8개월이 넘는 기간을 보내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중국으로 향했으나 무슨 기구한 운명이었는지 또 풍랑을 만나 필리핀(여송국,呂宋國)에 표착하게 된다. 여기서도 근 9개월이 넘는 기간을 지내다 중국에서 약 14개월을 보내고 의주를 거쳐 처자식이 있는 그리운 고향 땅을 밝게 된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홍어 어상(魚商)을 하던 평범한 섬사람인 문순득이 마침 우이도에서 유배 중인 정약전 선생에게 그가 표류해 다녀온 중국, 안남, 유구, 여송 나라들의 풍속과 의복, 가옥, 토산품, 언어, 선박 등등을 세세하게 구술하여 이를 체계적으로 기록이 가능하게끔 자료를 제공했다는 점이다. 놀라운 것은 표해록 권말에 112개의 단어를 유구어, 여송어와 우리말로 비교, 나열해 실었을 정도이다.
 
문순득은 그저 단순히 일개 홍어장사가 아니라 대단한 두뇌와 관찰력의 소유자였고 해외 문물을 적극 수용하는 지금으로 치면 세계인이요, 개명한 선각자였던 것이다. 

 
▲문순득이 내려 받은 교지
 
후일 필리핀인들이 우리 나라 제주도에 표류해 온 적이 있는데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많자 조정에서 문순득을 불러 통역을 할 정도였다고 하니 어학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고. 유통을 알던 문순득이 표류생활 중 중국에서 직접 가져온 부채, 장신구와 상례가 적힌 서책들이 지금까지 집안대대로 유품(遺品)으로 내려오고 있다. 
 
또한 우이도의 문씨가문은 외딴 섬에 유배되어 절망의 나락 속에서 고통의 세월을 보내고 있던 인물들에 대해 대대로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문순득도 집안 내력대로 유배객 들에게 각별했던 모양으로 이때 정약전 선생과 서로 나눈 교류와 대화들은 막막하고 고달픈 귀양살이에서도 선생이 붓을 놓지 않게 하는데 큰 힘이 되었으리라 여겨지고 그저 한낱 이야기 거리로 치부되어 잊혀질 표류객의 체험담은 정약전 선생의 붓끝을 통해 소중한 기록유산으로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1816년 우이도에서 유배 생활 중 숨을 거둔 형 정약전의 장례를 문씨(문순득 추정)들이 치러 준 고마움에 강진에서 유배 중이던 동생 다산 정약용은 감사의 편지를 보낸다.

 
문순득! 그의 파란 많은 생(生)도 흥미롭지만 서남해 바다 한 쪽 우이도 출신의 홍어장사인 그가 우리에게 남긴 행동과 자세에서 본 받아야 할 점은 크다 할 것이다.


출처 홍어세상 | 홍해촌장
원본 http://blog.naver.com/ysriver21/30020192714

[신안문화]표해록의 후손 문채옥씨를 찾아서


[신안문화13호-2003]                                             
 최성환의 신안문화탐방

 

                         표해록의 후손 문채옥씨를 찾아서

 

전남 신안군 도초면 우이도리 233번지에 살고 있는 문채옥(1920년생)씨는 표해록(漂海錄)으로 알려진 문순득(1777∼1847)의 5대 손이다. 그를 찾아가 『표해록』에 얽힌 이야기를 나누며, 현재 소장하고 있는 자료들을 살펴보았다.
 『표해록』은 200여 년 전 우이도에 살고 있던 문순득이 1801년(순조1) 12월 태사도(흑산도 인근)에서 홍어를 사 가지고 돌아오던 중 표류를 하게 되어, 1805년 1월 8일에서야 고향에 다시 돌아오게 된 일을 기록한 책이다. 이 기록은 당시 우이도에 유배와 있던 정약전에 의해서 집필되었는데, 그 내용은 문순득의 표류과정과 그가 다녀왔다는 유구(琉球, 오키나와)·여송(呂宋, 필리핀)지역의 풍속·가옥·의복·선박·토산·언어 등에 관한 것이다.
문순득과 『표해록』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도 언급되고 있어, 그 가치를 더욱 명확하게 해주고 있다.

 

 [전략]나주(羅州) 흑산도(黑山島) 사람 문순득(文順得)이 표류되어 여송국(呂宋國)에 들어갔었는데, 그 나라 사람의 형모(形貌)와 의관(衣冠)을 보고 그들의 방언(方言)을 또한 기록하여 가지고 온 것이 있었다.[후략]-1809(순조 9)년 6월 26일

 

한동안 이 『표해록』은 원본이 유실되어 정약전이 저술했다는 이야기만 전할 뿐 그 전체 내용을 알 길이 없었다. 『표해록』의 내용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후손인 문채옥씨의 공이 컸다. 문채옥씨는 고향인 우이도를 지키면서 선조들의 유품을 매우 소중하게 간직해 왔다. 그 중에는 『유암총서(柳菴叢書)』와 『운곡잡저(雲谷雜 )』라는 문집 형태의 작은 책 2권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중 『유암총서』에는  「표해시말(漂海始末)」이라는 이름으로 정약전이 지었다는 『표해록』의 내용이 그대로 옮겨져 있었다. 이를 처음 확인한 사람은 민속학자 최덕원(전 목포해양대학) 교수에 의해서였다고 한다. 또한 다른 문집인 『운곡잡저』에는 역시 정약전이 저술한 「송정사의(松政私議, 나무정책에 관한 정약전의 견해)」'가 담겨져 있다. 「송정사의」 또한 그 제목만 전할 뿐 내용은 알려지지 못했는데, 이 책을 통해 처음 밝혀지게 된 것이었다.


문채옥씨가 소중하게 간직해 온 이 두 권의 책을 통해 정약전의 사라질 뻔했던 저서들이 비로소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아쉽게도 현재까지 이 문집들의 정확한 저자나 집필연대는 확인되지 못했지만, 정약전의 기록 외에도 당시 사회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많은 자료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다면 정약전의 기록이 문채옥씨 집안(남평 문씨)을 통해서 전해 내려온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과거에 우이도에 유배되었던 인물들이 문씨 집안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외딴 섬에 유배를 간 인물들은 그 지역 유지들의 도움을 통해 고난한 유배지에서의 생활을 버텨나갔던 것으로 보여지는 데, 우이도에서는 문씨 집안이 바로 그러한 도움을 줬던 것 같다. 정약전 보다 더 후대에 유배 왔던 최익현의 경우도 우이도에 들어가서 처소를 문주인이라는 사람의 집을 사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문주인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알아보기 위해 문채옥씨가 소장하고 있는 족보를 들쳐보았으나 같은 이름을 찾아 볼 수는 없었다. 이는 문주인이 실존인물이 아니라기 보다는 그의 실제 이름과 족보에 남겨진 이름이 다르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런 경우는 간혹 있는 사례인데 섬 지역의 경우는 특히 빈번하다고 볼 수 있다. 우이도의 문씨들은 유배 온 인물들을 도와주면서 중앙의 덕망 있는 인사들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유지해 오고 있었던 것으로 알 수 있다. 오늘날 행정구역상 도초면에 속하는 '우이도'는 과거 조선시대에는 흑산도와 같은 권역으로 분류되었고, 이름 또한 '소흑산도'로 불리기도 하였다. 때문에 최익현의 『면암집』에는 국가로부터 흑산도 유배에 처해진 사람들은 지금의 흑산도까지 들어가지 않고, 육지와 조금 더 가까운 이곳 우이도에 와서 유배 생활을 보내기도 하였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표해록』은 기록을 한 정약전과 구술을 한 문순득이 합작한 200여 년 전의 해양문학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내용이 필리핀이나 일본의 언어와 풍속을 담고 있어, 신안군과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인지 일본의 어느 학자는 『표해록』을 영인하고, 일본말로 번역해서 이미 단행본으로 출간하기도 하였다. 또한『표해록』이 더 큰 의미를 간직하고 있는 것은 문순득이 표해 당시 가져왔다는 유품(부채, 장신구, 서적)도 지금까지 보관되고 있다는 점이다. 문채옥씨는 그동안 공개하지 않았다는 문순득의 유품 몇 가지를 보여주었는데, 이는 문순득이 중국에서 직접 가져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문순득의 경우처럼 관련 저술, 실록의 기록, 교지, 유품 등이 골고루 잘 보존되어 있는 사례는 매우 드물다. 내 조상에 대한 관심과 후손으로서의 도리를 다한다는 문채옥씨의 정성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여겨진다. 다만 현재 문순득의 묘는 우이도가 아닌 해남군 화산면 봉지리에 모셔져 있다. 문순득을 비롯한 선조들의 묘는 돌아가시고 나면 육지로 나가서 모신다. 시제일은 음력 10월 15일이다.

 

다음은 문채옥씨가 소장하고 있는 자료들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한 것이다.

1) 문집
○ 유암총서(柳菴叢書)
 ·크기: 세로 24cm, 가로 15,5cm
 ·분량: 총 95쪽
 ·주요내용: 漂海始末, 雲谷船說, 車說答客難
 ·자료적 가치: 정약전이 문순득이 표류했던 경험을 구술로 듣고 집필했다는 '『표해록』'의 내용이 실려 있고, 『표해록』에서 미쳐 언급하지 못했던 내용이 '운곡선설'이라는 이름으로 보충되어 있다.


○ 운곡잡저(雲谷雜 )
 ·크기: 세로 23cm, 가로 14.5cm
 ·분량: 총 177쪽
 ·주요내용: 운곡잡저권1-흑산도 관련 동정, 각종 소장, 민원. 松政私議
              운곡잡저권2-車說答客難, 贈言施洪量, 勤說示文絢, 百諺詩 등
 ·자료적 가치: 흑산진을 비롯한 당시 동정이나 민원 등에 관한 기록이 소상이 담겨져 있어 내용 분석을 통한 시대상과 사회상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정약전이 집필했다는 '송정사의(소나무정책에 대한 정약전의 의견)'이 담겨져 있다.

 

2) 교지
·수량: 6종(문순득 외)
·크기: 가로 72cm, 세로 52cm(동일)
·문순득 교지: 년대 1835년(도광15년), 문순득을 嘉善大夫(종2품)로 임명한다는 내용.
·자료가치: 6장의 교지 중 가장 빠른 시기의 것은 문채옥의 8대조인 문계창의 것으로 1716년에 절충장군으로 내려진 것이다. 문순득의 가계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 교지 하나하나 비단으로 말아서 보관되어 있다.

 

3) 호구장
·수량: 4종
·내용: 1841년 나주목 우이도 진촌 1통 4호 문씨 호구내용을 기록한 것
·자료가치: 우이도의 지명 주소체계, 문씨 가계 내용 등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4) 지도군 호적

·수량: 1종
·년대: 1897년 2월(건양2년)
·내용: 1897년 초대 지도군수 오횡묵이 발행한 호적 내용. 우이도 문광길의 호적으로 당시 38세였고, 조부가 가선대부 문순득으로 기록되어 있다. 
·자료가치: 1896년 지도군이 신설되면서 군수로 부임한 오횡묵이 그 이듬해 2월에 발행한 것으로 보인다. 지도군 초창기의 행정문서 서식을 엿볼 수 있고, 문광길의 가계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년호를 建陽이라는 한국연호를 사용하고 있다.

 

5) 문순득 유품
·수량: 4종(상례에 관한 중국서책, 부채, 노리개, 실띠)
·내용: 문순득이 표류했다가 중국으로 거쳐 육로로 우리나라에 다시 돌아왔는데, 그때 가져온 것이라고 전한다.
·자료가치: 『표해록』을 남긴 문순득의 유품으로서 매우 큰 가치가 있고, 『표해록』의 가치를 더 높여 줄 수 있는 물증이다. 부채에는 특별한 그림이 그려져 있지는 않다.

 


6) 호패
·수량: 2종(유학 문광길, 유학 문상권)
·크기: 문광길 호패 8.3m, 문상권 호패 6.8cm
·내용: 문순득 후손의 호패이다.
·자료가치: 조선말기 신분증에 해당하는 자료이고, 문순득 일가와 관련된 유품으로 활용가치가 있다.

 

문채옥 씨가 들려준 이야기 전설
○ 굴봉과 관련: 굴봉이라는 곳이 있는데, 면암선생이 그곳에 자주 올라 글을 읽었다. 어느 날은 선생이 그곳에 올랐는데, 갑자기 많은 비가 내렸다. 그러자 선생이 종이에 뭔가 써서 마을 쪽으로 내려보내자, 마을에서 큰 삿갓 같은 것이 굴봉으로 떠올라 갔다. 면암선생을 그것을 쓰고 비를 피해 마을로 내려왔다.(굴봉에 대한 내용은 최익현의 면암집에 그 지명이 언급되어 있다.)

○ 큰 돌 들기: 마을에 커다란 돌이 있었는데, 아무도 들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웠다. 그런데 면암 선생이 그 돌을 들 수 있으니 들어보라고 마을사람에게 말하면, 그 돌이 쉽게 들렸다.

○ 서당골: 마을에서는 공동산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부락에서 떨어져 있는데 그 곳을 서당골이라고 했으며, 정약전이나 최익현 선생이 그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 대문안집: 우이도에는 대문안집이라고 부르는 집이 있다. 어떤 사람이 지체 높은 분들만 사용할 수 있는 커다란 기둥과 초석으로 집을 지었기 때문에 관청에서 금지시켰다.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고, 아직도 마을 사람들은 대문안집이라고 부른다.

○ 선창공덕비: 선창가에는 1746년에 선창조성에 기여한 사람들을 기리기 위한 공덕비가 세워져 있는데, 훼손과 마모가 심하고 위치 또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어, 문채옥씨는 이 비를 새로 건립해 줄 것을 바라고 있다. 비문의 내용은 문채옥씨가 따로 써놓은 것이 남아 있다.


 

출처 추공의 문화세상 | 추공
원본 http://blog.naver.com/baguni11/60002921720